이 시대가 나쁜 남자를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친밀화의 코드는 자기 동일성 추구를 위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역설적 코드이다. 사랑을 통한 자기 완성은 자신을 일정 부분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욕망만을 가지고, 상대방의 정체성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순간, 그 코드는 깨어지고 만다.
지금 우리는 자신감을 중요시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공을 위한 많은 조언들은 자존감, 자신감, 자긍심, 긍정적인 마인드와 같은 것들을 강조한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측면을 가진다. 자기를 사랑하거나, 자기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올바로 타인들과 맞닥뜨리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애, 즉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이다.
사랑이라는 친밀화의 코드는 자기 동일성 추구를 위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역설적 코드이다. 사랑을 통한 자기 완성은 자신을 일정 부분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욕망만을 가지고, 상대방의 정체성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순간, 그 코드는 깨어지고 만다.
지금 우리는 자신감을 중요시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공을 위한 많은 조언들은 자존감, 자신감, 자긍심, 긍정적인 마인드와 같은 것들을 강조한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측면을 가진다. 자기를 사랑하거나, 자기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올바로 타인들과 맞닥뜨리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애, 즉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힘든 시절을 살고 있다. 대출이 없이는 삶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직장을 구하기는 어렵다. 물론 직장은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자아 실현으로서의 직업은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즉 자신의 욕망이 구현될 수 없는 현실에서 자기 동일성을 통한 자기애의 실현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언제,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사랑에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까.
나쁜 남자는 당당한 남자의 다른 표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만약 자신의 연인에게 차갑게 군다면, 다소 소홀하게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전혀 부족할 것이 없다는 오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지금 사귀고 있는 여성에게 순정을 다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타인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랑의 코드』라는 책에서는 나쁜 여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유럽의 경우를 드는 것이겠지만, 사실 사랑이라는 담론에서도 자아 실현은 이제 다른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만으로 자아 실현을 하던 시절은 지났고, 이제는 여성들도 다양한 직종에 도전함으로써 자아 실현의 방법을 다양하게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우리 사회의 폐쇄성으로 인해 여성은 차별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민감한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도 사랑만으로 (남자든 여자든)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절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쁘다 라는 말은 쿨-하다라는 말과 등가로 쓰인다. 기억에 얽메이지 않는 것, 한마디로 과거의 시간을 저장하지 않음으로써 현재에 충실하고, 그런 충실한 현재가 쌓여 미래로 향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현재 우리 젊은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삶이 모여 우리나라의 사회를 이루고 있음은 굳이 카오스모제와 같은 어려운 개념을 말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된다.
한편에서는 순정남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은 마초적인 짐승남과 나쁜 남자를 바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어떤 파트너를 요구하든 사실 문제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모두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나르시시즘을 요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수치심의 문화라고 불리는 동양, 그 중에서도 특히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제대로 정착할 수 있을지, 혹은 작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강제로 근대화 되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억지스럽게, 신자유주의와 각종 미디어들에 의해서 작업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것은 없는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어느 사회보다 뜨거우니까. 광장, 결코 개인적으로만 보이는 인터넷에서 조차 우리들은 저마다 조그마한 공동체적 광장을 형성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우리 특유의 나르시시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나는 우리들이 타인을 아직도 의식하고 있다는 데서 찾고 싶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타인을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이 말하는 역설적 코드는 잘못하면 폭력적 자기 동일성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니까"라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또한 마찬가지의 이유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는 적절한 방식의 사랑은 아닌 듯이 보인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더 정확하게는 타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을 올바로 긍정한 적은 없는 듯하다. 상대주의라는 말은 오히려 타인을 소외시키면서 멀리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며, 오리엔탈리즘, 페미니즘, 식민주의 등은 언제나 그들의 시선으로 타자를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은 왜 동양을 단순히 신비스러운 곳으로만 바라봤을까. 그리고 여성을 스스로 무장하도록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식민지를 미개하다고 판단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특정한 주체들이 타자를 그렇게 규정함으로써 만들어진 여러 작용일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그런 것이다. 나르시스는 우물을 바라볼 때, 결코 타인에게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을 바라보다가 남의 목소리만 따라할 수 있게 되어버린 에코가 있었지만, 결코 나르시스 자신이 그녀에게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에코는 사랑의 방식으로 자기 동일성을 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졌고, 그럼으로써 그는 자기 동일성을 구하려 했던 것이다.
에코와 나르시스,... 나는 이 둘에서 사랑의 극단적인 면을 본다. 타인만을 바라보며, 그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는 사랑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과, 오로지 자신만을 긍정하며 타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던, 그래서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자기자신과 하나 될 수 있었던 나르시스. 그 둘은 올바른 사랑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추구한 자기 동일성의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보다 긍정적인 길은 없을 것인지도 한 번 고민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